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탕카 이요탕카 (문단 편집) == [[백인]]과의 싸움 == 타탕카 이요탕카는 1863년 6월, 백인 군대와 처음 충돌했다. 샌티 수우족이 [[미군]]을 살해한 이른바 '미네소타 학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연방군이 공격을 해 오자 그는 젊은 전사들을 이끌고 그들과 맞서 싸웠다. 이후에도 수우족의 사냥지역을 침범하고 농지를 짓밟는 백인들과 잦은 싸움을 벌였고 그때마다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백인과 투쟁하며 보여 준 용기와 지혜로 1867년에 전체 수우족의 족장으로 추대되었다. 1870년대 중반 블랙힐스[* Black Hills. [[수우|수우족 언어]]인 Paha Sapa(검은 언덕)을 번역한 지명이다.]에서 금이 발견되자, 백인 총잡이들이 구름처럼 원주민의 땅에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이 땅을 보장한 1868년의 협약(라라미 제2차 협약)은 휴짓조각이 되고, 정부는 모든 수우족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따로 설정된 원주민 보호구역 내에 정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복하는 사람은 정부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한다는 위협성 경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추운 날씨에 노인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거의 400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정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타슝카 위트코]] 등 동맹자들과 함께 그들의 땅을 사수하기로 했다. 이듬해 3월, 드디어 조지 크룩 장군이 이끄는 연방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웅크린 황소'는 수우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을 몬태나 원주민 구역 내 자신의 캠프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6월 17일 크룩 장군의 부대와 로즈버드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타탕카 이요탕카는 주력부대를 리틀 빅혼 강의 계곡으로 이동시켜 최후의 결전에 준비했다. 여기서 죽을 힘을 다해 '태양의 춤'을 추어 실신했는데, 수많은 군인이 하늘에서 메뚜기처럼 자신의 진영으로 뛰어 내려오는 환상을 보고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6월 25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의 지휘 아래 연방군 주력인 제7기병연대가 부대를 공격해왔다. 처절한 싸움 끝에 타탕카 이요탕카와 [[타슝카 위트코]]는 제7기병연대를 문자 그대로 전멸시켰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안타깝게도 백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부군은 [[리틀 빅혼 전투]] 이후 더욱 거세게 공격했고, 원주민 전사들은 이에 맞서 초인적 사투를 벌였지만 점점 불리해지는 전세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정부군은 원주민들의 주식인 [[들소]]를 무차별로 죽여 그들을 굶겨 죽이는 작전을 폈다. 결국, 동료 부족들이 굶주림에 지쳐 하나 둘 정부군에 항복했고, 타탕카 이요탕카는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캐나다]]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캐나다 정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캐나다 역시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심했고 받아주면 미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했기에 거절한것이다.] 도주와 기아에 지쳐 도피 4년 만에 정부에 항복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